in the Philippines

정리 2

쉬리 2024. 1. 25. 12:56

 

삭풍이 분다.

여기서 이렇게 서늘한 기운이니

한국은 무척 춥겠다.

 

그들이 시동을 거는 소리가 난다.

골프를 가는 모양이다.

보이지가 않는다.

창문을 하얀 천을 사다가 네귀퉁이를 고무줄로 연결하여 막아놓았다.

저들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니 좋다.

 

보면서 살고 싶지가 않아서 이사를 가려고 생각하였었다.

이글리지 안의 타운센타,

그곳이 소유권이 타국인도 가능 하기 때문에

거기로 이사를 가려고 했다.

여기서 꼭 살아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그 타운 센타는 2층집이고 집이 좁다.

노인을 모시고 살기엔 적당치가 않은 집이다.

엄마가 이제 얼마나 더 사시겠는가.

이에 90, 걷지도 못하시고, 거동도 불편하시다.

화장실 출입도 힘들고

변기에 앉혀 드려야만 하는데, 나는 그걸 못한다.

엄마를 돌보다가 허리가 병이 났다.

다행히 아이비가 체격도 좋고 힘도 있어서

엄마를 잘 돌봐드린다.

그래서 아이비가 고맙다.

 

그 타운센타를 그이가 알아보았고, 들어가 보았는데

거기는 살만하지가 않다고 한다.

빈집은 많이 있지만 너무 협소하고

이층 올라가는 계단도 깍꾸막 같단다.

좁고 가파르다는 말이겠다.

 

그 타운센타로 이사갈 생각에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는데

갑갑해졌다.

 

곧 구정이고, 구정에 시내 가족이 온다고 하였다.

아직 그들과 우리 사이가 이렇게 틀어진 내용을 모르는 아이들이니,

아빠의 친구이고 결혼 주례를 서준 김총장 내외에게 인사를 하는게 당연한 것이다.

어쩌나, 

 

피할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명절마다 삼성 부동산 사장에겐 홍삼을,

정원 주택엔 참, 들기를 셋트를,

시골 큰 형님에게도 홍삼을, 

선물하는데

시내가 암웨이 사업을 하니

이왕이면 시내에게서 사야 한다.

선물을 주문하면서 시내에게 여기도 홍삼을 하나 사오라고 시켰다.

 

그들에게 들려보낼 요량이었다.

받든지 말든지,

 시내가 5월 15일 결혼하고 그해 여름 그들은 우리집에 와서 한달을 머물었다.

정관장 홍삼, 따지 않은 새병이었다, 드시라고 말은 했지만

한번도 먹는걸 못보았는데 나중보니 바닥이다.

 

그들이 홍삼을 좋아하는 걸 알게 된것이다.

와이프가 먹은건 아닐 것이다.

와이프는 뚱뚱하고, 열이 많은 사람이고

김총장은 왜소하고 작달막하니, 염소처럼 생겼다.

 

남편이 이야기를 듣더니 절대 반대를 하며

그들과는 어떤 인연도 연결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자신은 그들을 끊어 냈고, 인간처럼 여기지 않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못하다.

내 컴퓨터가 있는 자리는 바로 옆집인 그들의 집이 바로 내다 보이는 창문 앞이다.

자리가 시원하고, 다른곳은 적당한 곳이 없다.

집이 절반만 다락방처럼 준 이층인 집이라 

다락 아래인 내 방은 덥지가 않고 양쪽 창문 가운데라 이 자리가 명당인거다.

 

난또 컴퓨터 앞에 꽤 오랜 시간 앉아 있는다.

그러면 그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것이 보인다.

 

그들을 안보고 살고싶다.

한집이라도 건너 집이면 괜찮았을 텐데,

이사장집이 옆집이고 그들이 건너, 건너 였었더라면,

 

당신이 괜찮다지만, 나는 정말 괴롭다. 이건 고문이다.

안보고 싶은데, 생각도 하기 싫은데, 

내가 부정적 말을 잘 안하는 편이다.

그이는 내가 힘든것을 알기는 해도 절실하다는 걸 모르는가보다.

 

 

그는 흔쾌히 이사 갈 것을 결정한다.

어디든 가자, 깔라따간, 혹은 아마데오, 심지어 가가얀데오로까지, 

민다나오의 가가얀데오로는 지금 채율이가 어학 연수중인 지역이다.

과일 값이 엄청 싸고 살기도 좋은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가얀데오로는 가지 못한다.

그이하고 단 둘이라면 어디든 가겠지만, 엄마가 계신다.

비자 연장이 안되어 있는 엄마는 신분증 제출을 해야하는 곳은 갈 수가 없다.

그러니 비행기나 배는 못 탄다.

그리고 저런 엄마를 모시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다음날 부터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로 하였다.

 

생각이 많으니 잠을 설쳐서 몇번에 걸쳐 잠을 깨고

새벽 5시 못되어서는 걷기로 하였다.

빌리지를 걸으며 기도도 하고, 생각을 정리하다가

문득, 옆집을 지나며, 혹시, 이사람들이 한국에 나갈 예정은 없을까 싶다.

알아보고 싶다.

이들이 나간다면 굳이 우리가 이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알아보나?

아, 내가 물어보면 되지 싶어, 이미 날은 환히 밝았고

이사람들이 잠을 깨어 있는 것 같다.

 

벨을 눌렀더니 뒤쪽에서 아떼가 내다보더니

내가 왔다는 말을 했는가 보다.

여자가 도끼눈을 하고는 걸쇠를 걸어놓은 채로 빼꼼히 문을 연다.

나, 싸우러 온것도 아니고 화해하러 온것도 아니고

뭘좀 물어보러 왔다고 하는데도 말 안한다고 가라고 한다.

도데체 왜 이러느냐고 하니,

"친구 와이프를 도둑년이라고 하는 너는 용서 못해" 하며 소리를 지른다.

난 그런말 한적이 없다하니, 일주일이면 명희가 오니까 명희에게 물어보랜다.

 

이사할 계획 없느냐고 하니 미쳤어 이사를 하게,

아, 그래 그럼 내가 이사하면 되겠네, 

나도 열받아서 소리를 지렀던가 보다.

비투 사모가 나와서 나를 끌어안고 여자는 문을 닫아 버렸다.

 

그날은 가슴이 갑갑하고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분이 삮여지지가 않고 종일 밥도 못 먹겠고 정말 힘든 하루였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 또 걷기를 하면서, 기도 하면서,

내 마음은 풀어지기 시작하고, 회복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심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미워할 가치 조차 없다고 생각하니 

모든게 풀리기 시작한다.

나이 값도 못해, 어리석어, 유치하기 짝이 없다.

명희가 그렇게 여자에게 말 했을리가 없다.

사리분별도 못하고, 어떻게 인간 관계를 그렇게 맺어갈 수가 있는 걸까?

 

이해가 안된다.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제는 화해할 필요도 없고

피할 필요도 없고 마음 쓸 필요도 없다.

 

한때 여자를 내가 좋아했었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 했었다.

그러니까, 딸 둘을 다 주례도 맡기고,

 

구미에서 몇 십년을 함께 살았다.

막상 함께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닥 함께한 시간은 얼마 안되었다.

 

처음 여자를 보았을 때,

해리 아빠와 막 결혼해서 구미에 왔을 때,

학교 선생을 하다가 결혼을 한 그녀는 그 때는 예뻤다.

해리는 시내보다는 한두살 어리고

가람이가 돐날 해리가 백일 이었던가?

 암튼 해리 떡을 가람이에게도 주었었다.

 

여자는 지금도 살림을 취미로 하는, 

음식 만드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아이들 어릴 때에도 부엌이 마치 실험실 마냥 비이커들이 있고

음식도 꽤 잘 했던것 같은 기억이 있다.

닭 백숙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맛있었던 것 같아 나중에 따라 해본 것 같다.

 

손님 초대도 많이 하고 식탁 차림을 마치 쉐프처럼 잘 차려낸다.

암튼 음식 만들기 좋아하는 건 인정,

하지만 무엇이든 맛있다고는 말 못함.

 

함께 통영, 김총장의 작은 아버지 댁에를 간 적이 있다.

굴을 말려서 제품을 만드는 그런 공장을 하고 계셔서

말린 굴을 많이 얻어 온적도 있다.

 

 또 언젠가는 식목일 이었던가.

그집 차로 바닷가 해산물 시장을 함께 가서

새우며 해산물을 사오고 딸기를 사오고,

그랬던것 보니, 식목일 쯤 되었을려나,

통영에 갔던 날이 해산물 시장도 갔던 날인지

이젠 기억도 가물 가물 하다.

 

한번은 우리가 키우던 소철이 죽어가는 걸

해리 아빠가 가져가서 살려서 새순을 예쁘게, 살려준 적도 있다.

 

여자는 학교 선생이었고, 과학 선생이었다는데

남편을 박사 학위 받게 하기 위해서

그 비용을 대느라 그랬던 것 같은데

학생들 모아서 과외 지도를 하였었다.

 

공부에 별로였던 우리 애들, 시내를 함께 과외 모임에 넣어주어서

한달인지, 방학동안에 공부를 다닌 적도 있다.

 

아이들 결혼 시키고, 두 애들 주례를 해주고

그 때 까지는 잘 지냈었다.

오죽하면, 해리 아빠는 자기가 먼저 죽으면

시내네 옆에 가서 살라고까지 했을까.

 

시내가 결혼 한 2010년, 5월 15일 그해 여름에 

우리집에 와서 한달을 머물면서 골프를 치고 갔다.

 

다음 겨울에는 또 오기가 미안했던지, 

따가이따이에 하숙을 하며 골프를 치고 갔고

사이 사이 우리집에도 오고 했다.

 

그 다음 여름에 또 우리집에 와서 보름정도 머물었다.

그러면서 그 때, 지금 여기 빌리지를 만드는 과정에

자기들도 참여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해리네, 이사장네 3집을 남편이 집을 짓게 되었다.

해리네는 그 과정에서 한다, 안한다, 변덕을 부렸다.

그 안한다는 말이 반가왔고,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러다가 또 하겠다고 하니 한숨이 푹 나왔다.

그들과 한달, 보름, 함께 지내보니, 

참 보링한 사람들이고, 사회적 지위나 있을 뿐

정말 재미 없는 사람들이었다.

 

인격적인 매력도 없고,

골프 초보였던 나를 어찌나 가르치려고 드는지 아주 고역이었다.

 

집을 지으면서, 한번도 어찌 진행이 되느냐, 수고한다, 말이 없다.

돈이 떨어지면 내가 메일로 말을 하면

느낌이 마지 못해 보내주는, 이건 마치 빚쟁이가 빚 받으려고 독촉하는 형국이어서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다가 그이는 남자를 싫어하기 시작 했다.

함께 골프를 치면, 자꾸 신경질을 내고, 화를 내고

다시는 골프를 함께 안친다고 다짐을 한 터였다.

 

아, 그때, 이사장네 하고 터를 바꾸었어야 했는데, 정말 치명적인 실수이다.

 

해리아빠가 설계한대로 집을 지어 주었다.

집이 그냥 지어지는 것인가.

그야말로 종합예술이라고 하는 건축 아닌가.

그 집을 짓는 과정에서 그이와 함께 온갖 물품들을 사러 얼마나 쫓아 다녔던가.

수고비를 한푼이라도 받은,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리가 건축을 업으로 하는 입장도 아니고,

수고비는 커녕, 카드로 물건을 샀는데, 그 수수료도 받지를 못했다.

일억 정도 들었을테니, 어쩌면 삼십만원 쯤은 되려나,

 

집을 완전히 완성한 상태는 아닌 상태에서 그들이 방학을 맞이 하여 왔다.

해리네 집을 짓던 인부들은 이사장 집을 짓는데 투입이 된 상태였다.

 

집이 완성이 안되었으니 그들도 어려움을 겪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이사장집 짓는 인부들을 마음대로 빼가서 일을 시키고,

자꾸만 남편에게 짜증을 부리고,

 

내가 그들에게 가서 말을 했다.

집을 이정도 지어주었고, 오셨으니까, 마무리는 본인이 하시라고,

 

아마도 그런 말들이 고까웠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런데 그들은 이상한 계산법을 가지고 있다.

 

우리 차를 자기들을 주고 우리는 새차를 사라고 말한다.

전에는 해평에 우리 땅에 함께 집을 짓자고 말을 하는데,

그 땅 값을 지불하겠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를 만만하게 보는 건가, 이상하다.

 

 남자가 일본에 왔을 때, 그이도 일본 출장 중이라 

많이 도와 주었고,

일본을 간다고 도움을 요청해와서

그이의 선배가 지사장으로 있어서 김총장이 일본을 가는데 도와주라고 부탁을 했댄다.

도움을 받았으면 그 중간 역활을 했던 남편에게

잘 대접 받아서 감사했다고, 그런 말을 해야, 남편이 선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게 아닌가.

언젠가 선배를 만났는데, 어떻게 대접 했다는 말을 하는데 무척 미안스럽고 고맙고 했었다고 한다.

 

일본 뿐만이 아니다.

필리핀에 간다고 도움을 요청했을 때에도

그 때는 홍사장이 사장으로 있을 때인데

홍사장이라면 대접이 엄청 깍듯한 사람이라

대접을 잘 해주었댄다.

마찬가지로 아무 말이 없었댄다.

나중 홍사장을 만나서 대접한 이야기를 듣고는

미안스러웠댄다.

 

한때 지역 노사 협력, 뭐 그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남편이  금오공대에 오천만원을 희사하는 역활을 했다.

물론 회사 차원의 일이었고, 또 남편은 금오공대의 겸임교수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였나, 한번 해리네 총장이 되었다고 초대 받아 간 적이 있다.

총장 사택으로 갔는데 사택 규모가 엄청 크고 대저택이었다는 인상이다.

상차림도 모자람이 없고 격식을 잘 갖춘, 대접 받는 기분이 들게 하였다.

 

그 때 나는 선물로 빨래 삶는 커다란 솥을 사갔었는데,

그집 살림의 규모를 보고 내 선물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미국으로 교환 교수를 몇년 다녀온 뒤이기도 했는데

미국에서 아주 고급스러운 접시며 집기들을 셋트로 사가지고 와서

그 기세에 눌렸던 기억이 있다.

 

그런 저런 세월들의 기억이 있는데, 

지금 이렇게 된 것을 뒤돌아 보면,

우리가 뭔가 잘못한 점을 없는가?

생각도 해본다,

설사 잘못한 뭔가가 있더라도

저렇게 한다는 것은 몰상식, 아니 인간이지 않은거 아닌가?

 

기가 막힌다.

어이가 없다. 

정말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다.

 

아직 이야기가 남았다.

남자가 가방을 훔쳤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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